
한국의 100대 명산 <소요산>
경기도 동두천과 포천의 자랑 소요산(逍遙山)은 해발 587m로 고도가 아주 높은 산은 아닙니다. 하지만 막상 발을 들이면 "산은 높이로만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아주 알차고 짜릿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중교통(지하철 1호선 소요산역)으로도 접근성이 훌륭해 수도권 등산객들에게는 이미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본격적인 산행기에 앞서, 소요산(逍遙山)은 어떤 산인가? 를 묻는다면, 산세가 아주 장쾌하거나 거대하진 않지만, 멀리서 보면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합니다. 그 수려한 경관 덕분에 일찍이 1981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산림청 선정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소요(逍遙)'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유유자적하다', '한가롭게 걸어 다니다', '여기저기 방황하다'라는 아주 낭만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야사나 구전으로는 조선 시대의 대석학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이 이 산에 조용히 들어와 유유자적하게 '소요'하며 거닐었다고 해서 소요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이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야사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전설이든 사실이든 산을 오르다 보면 왜 옛 선비들이 이곳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방황하듯 거닐고 싶어 했는지 그 마음이 100% 이해가 갑니다.
등산코스 안내
소요산은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 나한대, 의상대(정상), 공주봉 등 총 여섯 개의 봉우리가 자재암과 계곡을 말발굽(U자형) 모양으로 둥글게 감싸고 있는 독특한 지형입니다. 어떤 코스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두가지 코스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코스는 소요산의 정석인 짜릿한 '6봉 환종주 코'입니다.
- 소요산역/주차장 - 일주문 - 원효굴/원효폭포 - 108 계단 - 금강문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칼바위 능선 - 나한대 - 의상대(정상) - 공주봉 - 일주문 원점회귀
산을 제대로 타보고 싶다 하시는 등산 마니아분들이나 체력에 자신 있는 분들이 선택하는 '소요산 종주 코스'입니다. 저 역시 이 종주 코스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산 전체를 온전히 한 바퀴 도는 환종주라 성취감이 어마어마합니다. 소요산역에서 나와 정비가 잘 된 완만하고 아름다운 아스팔트 숲길을 따라 힐링하며 걸어갑니다.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으며 약 15분 정도 올라가면 소요산의 관문인 일주문이 나타나고, 곧이어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원효폭포와 원효굴을 만나게 됩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설화'를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당나라 유학길에 무덤에서 마신 달콤한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물이었다는 깨달음의 설화. 모든 것은 마음(一心)에서 일어난다는 그 대단한 말씀을 되새기며 '이 등산도 힘들지 않다, 행복하고 즐거운 경험이다.'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봅니다. 원효폭포를 지나면 본격적인 갈림길이 나옵니다. 오른쪽은 공주봉으로 바로 치고 올라가는 길이고, 왼쪽이 하백운대로 향하는 종주 길입니다. 왼쪽으로 향해 그 유명한 108 계단을 마주했습니다. 오기가 생겨 발걸음마다 숫자를 세어보았는데, 오차 없이 정확히 108개 계단이 맞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다 오르면 원래 해탈문이라 불렸던 '금강문'이 나옵니다. 마음을 정돈해 주는 좋은 글귀들을 읽으며 숨을 고릅니다. 하백운대 오르막으로 발을 디디면 이제부터 자비 없는 본격적인 오르막의 시작입니다. 소요산 상급 코스는 길 자체는 뚜렷하지만, 체력이 없으면 통곡을 하게 되는 구간입니다. 특히 소요산의 돌들은 북한산이나 도봉산처럼 둥글둥글한 바위가 아니라, 마치 칼로 깎아놓은 듯 날카롭고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발목이 꺾이지 않도록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약 1시간 정도를 오르면 첫 번째 봉우리인 하백운대에 도착을 합니다. 하지만 정상에 서면 등산객을 반겨주는 멋진 정상석 하나 없이 휑한 나무 이정표만 덜렁 있어서 솔직히 좀 허탈합니다. 하백운대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중백운대를 만나는데 역시나 아무것도 없이 휑한 표지판만 있습니다. 기암괴석의 자연 신비를 감탄하며 오르다 보면 상백운대에 도착합니다. 상백운대를 지나 나한대로 향하는 길에는 소요산 최고의 난코스인 '칼바위 능선'이 등장합니다. 왜 칼바위인지 이름 그대로 보여주는, 작두 날처럼 날카로운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는 험난한 암릉 구간입니다. 최근 데크 로드가 설치되어 과거에 비하면 조금은 나아졌으나, 여전히 방심하면 무릎이나 발목 부상을 당하기 딱 좋은 지형입니다. 악몽 같은 돌길과 계단을 통과하면 해발 571m의 나한대에 도착합니다. 이곳 역시 고생한 것에 비하면 정상석이 너무 박하고 소박해서 보람이 덜합니다. 나한대에서 해발 587m의 최고봉인 의상대까지는 거리는 짧지만, 능선을 따라 쭉 내려갔다가 다시 치고 올라가는 구조라 막판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옵니다. 소요산 주봉인 의상대에 도착하면 번듯한 돌로 된 정상석을 만나게 됩니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조망되는 뷰가 일품입니다. 마차산 너머로 동두천 시내가 보이고, 파주와 양주 경계에 있는 감악산, 그리고 뒤편으로는 국사봉과 왕방산 등이 시원하게 조망됩니다. 의상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등산로 아님' 팻말이 있어 당황하기 쉬운데, 당황하지 말고 살짝 내려와 왼쪽 우회길로 가야 공주봉으로 연결됩니다. 길을 잃기 쉬운 포인트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무시무시한 계단들을 지나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 526m의 공주봉에 다다릅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에서 이름을 딴 봉우리인데, 참 재밌게도 정상은 의상대사 이름(의상대)이고 요석공주는 여기 공주봉에 머물러 있습니다. 공주봉 뷰는 의상대보다 오히려 동두천 시내가 더 한눈에 시원하게 트여 있어 소요산 최고의 뷰맛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공주봉에서 스탬프를 찍고 터덜터덜 하산하는 길, 등산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소요산 흑염소'를 만났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야생에서 자란 녀석이라 마음이 짠해 저만의 이름을 지어주고 내려오니 처음 출발했던 108계단 갈림길 임도가 나오며 소요산 환종주가 안전하게 끝이 났습니다. 두 번째는 소요산의 알짜베기만 맛보는 코스입니다.
- 소요산 관광지원센터 - 일주문 - 구절터 - 공주봉 - 능선길 - 의상대(정상) - 샘터 하산로 - 자재암 - 일주문 원점회귀
많은 체력을 소모하지 않고 소요산의 핵심 봉우리와 최고의 경치를 즐기고 싶으신 분들께 적극 추천해 드리는 실속형 코스입니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공주봉 방면으로 꺾어지면 숲길이 나오는데, 지도상에는 이곳이 '상급자 코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짧고 굵게 경사를 치고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초반 데크 계단을 지나고 나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돌계단과 거친 너덜지대(바위 무더기 길)를 마주하게 됩니다. 경사가 대단하진 않지만 지면이 불규칙하고 미끄러운 돌들이 많습니다. 제대로 하체 근력 운동을 하며 숨이 턱 끝까지 찰 때쯤, 가뭄의 단비 같은 데크 계단을 오르면 공주봉에 닿습니다. 힘든 너덜길을 올라와 탁 트인 공주봉 데크에서 내려다보는 시원한 조망은 가슴속까지 뻥 뚫어주는 청량감을 선사합니다. 공주봉에서 정상인 의상대까지 가는 1.2km 구간은 시야가 사방으로 터지는 수려한 능선길입니다. 약간의 내리막과 오르막 너덜이 섞여 있긴 하지만, 멋진 산세를 양옆으로 감상하며 걷는 길이라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눈이 제대로 힐링하는 구간입니다. 하산은 의상대와 주봉 사이에 있는 '샘터 하산로'를 이용합니다. 일주문까지 약 2.6km 코스인데, 초반 하산길 경사가 정말 어마어마하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산행 팁
소요산 주변은 군사적 요충지라 군부대가 많습니다. 타이밍이 안 좋으면 산행 내내 근처 사격장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나 군용 비행기 굉음을 자장가 삼아 등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고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요산은 언제 가도 지루할 틈이 없는 알찬 산이지만, 계절마다 뿜어내는 매력이 완전히 다릅니다. 봄에는 산 입구부터 자재암 부근까지 진달래와 산벚꽃이 화사하게 연분홍빛 수채화를 그립니다. 특히 5월 초순에 돋아나는 연둣빛 신록과 뾰족한 기암괴석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생동감 그 자체입니다. 여름의 소요산은 원효폭포, 청량폭포, 옥류폭포 등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계곡이 있어 무더위 대피소로 제격입니다. 울창한 활엽수림이 터널을 만들어 그늘을 제공하고, 비가 온 직후에 가면 수량이 풍부해져 청량감이 극에 달합니다. 가을은 소요산의 하이라이트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경등산의 으뜸'이라는 말답게 화강암 절벽 사이로 타오르는 붉은 단풍은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합니다. 매년 10월 말에는 단풍 축제도 열립니다. 다만 이 시기 주말에는 1호선 전철과 등산로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니, 한적한 산행을 원하신다면 평일이나 새벽 산행이 필수입니다. 소요산의 겨울은 눈 덮인 암릉 능선이 장엄한 설경을 연출합니다. 날씨가 매서워지면 계곡의 폭포들이 거대한 빙폭으로 변신하는 장관을 볼 수 있고, 시야가 맑은 날 정상에 서면 연천과 포천 일대의 산세가 막힘없이 눈에 들어옵니다.
에필로그
소요산은 해발 고도만 보고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뾰족뾰족한 칼바위와 끝없는 너덜길, 무수한 계단 맛에 큰코다치기 십상인, 아주 매콤하면서도 매력적인 산입니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봉우리마다 터지는 수려한 조망과 가을날의 붉은 단풍, 그리고 하산길에 만나는 시원한 폭포와 고즈넉한 자재암은 등산의 참된 재미를 깨닫게 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서울 근교에서 대중교통으로 가볍게 떠나 묵직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산을 찾으신다면, 소요산으로 유유자적 '소요'하러 떠나보시면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