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산을 어느정도 즐긴 분들이라면 흔히 '암릉산행'을 얘기할 때 도봉산의 Y계곡이나 월출산의 아찔한 바위 능선, 혹은 완주의 대둔산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산을 타면 탈 수록, 그리고 거친 바위가 주는 역동성에 중독될수록 가슴 한구석을 자극하는 숨은 명산이 있습니다. 바로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와 화천군의 경계를 가르는 해발 779m의 오봉산 입니다. 팔봉산의 강렬한 여운이 채 가시기 전, "봉우리가 다섯 개뿐이니 여덟개인 팔봉산보다 쉽지 않겠냐"는 안일한 마음으로 발을 들였다가 온몸의 땀을 쏟아내고 왔습니다.
한국의 100대 명산 <오봉산> - 호반의 기암성
오봉산은 태백산맥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한 줄기가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지점과 맞닿으며 형성된 산세입니다. 이웃한 용화산, 가리산과 함께 강원 북부의 험준한 지형을 완성하는 축이기도 합니다. 이 산의 가장 큰 구조적 특징은 다섯개의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연이어 솟아오른 바위성 이라는 것입니다. 부르기 쉽게 1봉부터 5봉으로 명명되기도 하지만, 각 봉우리마다 고유의 이름도 있습니다. 1봉부터 나한봉, 관음봉, 문수봉, 보현봉 그리고 5봉인 해발 779m 의 비로봉 입니다. 과거 '경운산(慶雲山)' 혹은 '청평산'이라 불리던 이 거친 화강암의 성채는, 오늘날 거친 암릉을 즐기는 등산객들에게는 일종의 '최종 보스'와 같은 아우라를 풍깁니다.
등산코스 안내

오봉산의 등산로는 크게 '배후령'을 기점으로 하는 코스와 '청평사 선착장(소양호)'을 기점으로 하는 코스로 나뉩니다. 각 코스는 고도차와 접근성 면에서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띱니다. 배후령 코스는 해발 600m 지점에서 시작해 정상인 5봉까지 고도차가 200m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봉산 다녀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상상하는 그 박진감과는 거리가 멉니다. 제가 청평사코스와 배후령코스 두군데 다 경험해 보았을 때 배후령 코스를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왜 허무함을 토로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습니다. 청평사 코스는 정상 5봉까지 치고 올라가는 내내 경사가 가파르고 바위를 직접 손으로 짚어야 하는 구간이 연속으로 나옵니다. 특히나 홈통바위 구간은 바위 사이 좁은 구멍을 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데다 경사까지 급해서 처음 마주치면 잠시 멈칫하게 됩니다. 체형이 크거나 배낭이 두툼한 분들은 무리하지 마시고 바로 옆에 잘 닦인 우회로를 이용하시는게 현명합니다. 억지로 끼어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저는 청평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정상(5봉)을찍고 4봉, 3봉, 2봉, 1봉을 거쳐 다시 청평사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안내드리겠습니다. 총 9km에 휴식시간 포함 약 4시간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청평사 코스는 중반부터 거의 쉬지 않고 암릉 구간이 이어집니다. 밧줄과 쇠말뚝 계단에 의지해야 하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구멍바위를 처음 만났을 때는 솔직히 조금 무서웠습니다. 원래는 깊은 동굴이었는데 지각 변동으로 입구 부분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기묘한 형태였는데, 산에서 이런 지형지물을 처음 봐서 괜히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암릉 위로 올라서자마자 남쪽으로 소양호가 펼쳐지는 풍경이 나타났는데, 그 순간 직전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정상인 5봉에서는 남쪽의 소양호와 북쪽의 파로호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대형산악 호수 두개를 능선 하나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은 제가 다녀온 산들 중에서도 꽤 드문 편이었습니다. 바위와 노송(老松), 그리고 에메랄드빛 호수가 한 프레임 안에 담기는 풍경은 산에서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은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만, 정상의 감동 속에서도 옥의 티처럼 아쉬운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오봉산의 정상석 이었습니다. 오봉산이 가진 역동적이고 뾰족한 암릉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마치 공동묘지의 묘비를 연상케 하는 둔탁하고 네모난 석재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왕이면 오봉산의 거친 바위 질감을 살려 좀 더 둥글고 세련되게, 혹은 봉우리의 뾰족함을 형상화한 삼각형 모양으로 세워두었다면 100대 명산의 품격이 더 살지 않았을까 하는 주관적인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산길에 청평사(淸平寺)에 들렀는데, 이 절이 단순한 하산 경유지가 아니라는 걸 발로 걷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청평사는 신라 때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로,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고찰(古刹), 즉 오래된 절이 산 한가운데 이렇게 온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청평사 회전문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회전문(廻轉門)이란 불교 건축에서 사찰 입구에 세우는 문으로, 이 문을 통과하는 것이 속세를 벗어나 불국토로 들어선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문에는 전설이 하나 얽혀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평양공주가 죽은 청년의 혼이 상사뱀으로 환생해 몸을 10년간 감고 떨어지지 않은 채로 이곳 청평사까지 흘러들어왔고, 공주가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번개가 뱀을 치거나 뱀이 스스로 해탈해 몸을 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주는 그 청년을 기리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그 탑이 지금도 청평사 경내에 남아 있습니다. 청평사 곁에는 구성폭포도 있습니다. 구성(九聲)이란 이름은 주변 소나무 아홉 그루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물소리가 환경에 따라 아홉 가지로 달리 들린다는 설이 함께 전해집니다. 춘천 3대 폭포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 4시간 가까이 바위를 기어오른 피로가 그 자리에서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종합해보면 배후령코스보다는 청평사코스로 오봉산을 즐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산행 팁 - 오봉산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산은 아닙니다.
오봉산에 다녀온 뒤 한 가지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 산은 '난이도와 풍경이 반비례하지 않는 산'이라는 것입니다. 힘들수록 보상이 커지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모든 등산객에게 추천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1봉부터 4봉까지의 구간은 제 경험상 뷰나 암릉의 재미가 5봉에 비해 확실히 떨어집니다. 5봉 정상석에서 바라본 소양호 풍경이 압도적이었던 것과 달리, 나머지 봉우리들은 '이게 끝인가?' 싶은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5봉만 찍고 청평사 방향으로 바로 하산하는 루트를 권하고 싶습니다. 구성폭포까지 구경하고 내려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산행이 됩니다. 1봉에서 청평사로 내려오는 해탈문 방향 길은 정비가 거의 안 된 구간입니다. 낙엽이 쌓이고 돌이 굴러다니는 루트인데, 제가 직접 걸어보니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너무 안 다녀서 흔적이 희미합니다. 산에서 길을 잃어본 경험이 없거나, 잘 정비된 등산로만 걸으셨던 분들께는 정말 비추천합니다. 또 한 가지 알고 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주말이나 봄철 진달래 시즌에는 홈통바위 같은 좁은 암릉 구간에서 병목 현상(bottle-neck)이 심각하게 발생합니다. 병목 현상이란 좁은 통로에 사람이 몰려 전체 흐름이 멈추는 상황으로, 벼랑 끝 좁은 구간에서 수십 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우회로 위치를 미리 확인하고 출발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Q&A>
Q : 오봉산 등산 초보자도 갈 수 있나요?
A : 배후령 코스는 고도차가 작아 체력 부담이 적지만, 청평사 코스는 암릉과 급경사가 많아 초보자에게는 상당히 벅찬 코스입니다. 등산화와 장갑을 반드시 챙기시고, 처음이라면 홈통바위 우회로 위치를 미리 파악한 뒤 출발하시는 게 좋습니다. 혹시 암릉 경험이 전혀 없으시다면 좀 더 완만한 산을 먼저 경험하고 오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Q : 청평사까지 배 타고 가는 방법도 있나요?
A : 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청평사 선착장까지 들어오는 수상 접근 코스가 운영됩니다. 소양호의 에메랄드빛 물색이 해외 풍경 못지않다는 평이 많고, 춘천 시내에서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가능해 승용차 없이도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기차로 춘천역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입산하는 이른바 '철도 산행' 코스로도 알려진 루트입니다.
Q : 오봉산 봄 산행은 언제가 제일 좋습니까?
A : 봄철에는 오봉산 전체가 진달래로 뒤덮이는데, 특히 3봉에서 2봉을 거쳐 1봉으로 이어지는 북쪽 사면 능선이 바위와 진달래가 어우러져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4월 중순 전후가 절정이지만 해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출발 전 최근 산행 후기를 검색해 개화 상황을 확인하시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Q : 오봉산 주차는 어디에 하면 됩니까?
A : 청평사 방면으로 접근하는 경우 청평사 주차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배치고개 방향은 변변한 주차 공간이 없어 노상 주차를 할 경우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도로에서 다른 차량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배치고개는 전망도 특별하지 않은 편이어서, 별도의 이동 수단이 없다면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는 코스입니다.
에필로그
춘천 오봉산은 명백히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산입니다. 한쪽 얼굴은 소양호를 내려다 보며 기암괴석을 타는 짜릿하고 수려한 '천혜의 바위성'이고, 다른 한쪽 얼굴은 거친 정비 상태와 상업적 번잡함이 공존하는 '관광지의 민낯'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을 찾을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단연 "YES"입니다. 팔봉산이나 운악산보다 더 끈적한 땀을 요구하는 정직한 난이도, 정상에서 마주하는 소양호의 압도적인 에메랄드빛 풍경, 그리고 하산길에 만나는 천년의 설화는 그 어떤 불편함도 상쇄할 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오봉산은 '정보를 가지고가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산'이라 생각합니다. 처음 방문하신다면 청평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5봉 정상을 찍고, 청평사와 구성폭포를 거쳐 내려오는 코스를 권합니다. 가능하다면 봄 진달래 시즌을 노려보시고, 주말 암릉 구간 병목이 걱정된다면 평일 이른 아침 출발을 추천드립니다. 오봉산은 분명 기억에 남는 산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