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수많은 명산 중에서도 경기 동부의 산군은 독특한 위용을 자랑합니다. 그중에서도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862m의 유명산(有明山)은 사계절 내내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100대 명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완만한 능선의 포용력과 깊고 거친 계곡의 반전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여름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등산객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계곡 물놀이 산행'일 것입니다. 서울 근교에는 많은 산중에 막상 몸을 푹 담그고 제대로 피서를 즐길 만한 계곡을 품은 산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들은 대부분 계곡 입수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수도권 최고의 여름 계곡 물놀이 산행지는 바로 유명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의 100대 명산 <유명산>
개인적으로 유명산을 여름에 꼭 가야 하는 산으로 꼽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접근성, 선선한 등산로, 그리고 계곡 물놀이가 가능한 깊고 수려한 계곡이 있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도 자차를 이용하면 1시간이면 갈 수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도 유명산 자연휴양림까지 직통으로 운행하는 버스가 있어 자차 없이도 당일치기로 부담 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등산 코스 역시도 시작 고도가 이미 300m를 넘기 때문에, 정상까지 실제로 치고 올라가야 하는 고도는 약 550m 내외입니다. 특히 올라가는 주능선이 울창한 나무들로 빽빽하게 그늘져 있어서 여름 폭염 속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산행할 수 있습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 유명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마유산(馬遊山)입니다. 조선 시대 발간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고문헌에는 분명히 이 일대에서 말을 방목해 길렀다 하여 마유산이라는 고유 지명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부르는 '유명산'이라는 이름은 다소 허무하고도 황당한 해프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73년 한 산악회에서 국토 자오선 종주를 하던 중 이 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당시 주민들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산악회 측은 이름이 없는 산이라 판단했고, 일행 중 홍일점이었던 여성 대원의 이름인 '진유명' 씨의 이름을 따서 '유명산'이라 명명해 지도에 올렸습니다. 이 종주기가 당시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연재되면서 이 가공된 이름이 전국적으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등산객으로서 우리는 이 산을 오를 때, 화려하게 빛나는 '유명(有名)'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말들이 거닐던 평화로운 '마유(馬遊)'의 옛 풍경을 함께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등산코스 안내
유명산 산행의 정석은 능선을 먼저 등반하고 하산 때 계곡물에 몸을 담그는 코스입니다. 국립유명산자연휴양림 매표소를 기점으로 원점회귀가 가능한 이 코스는 약 4시간정도가 소요되며, 유명산이 가진 두 가지 얼굴을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는 황금 루트입니다.
- 유명산 자연휴양림 주차장 - 매표소 갈림길(우측) - 북능선 오르막 - 유명산 정상 - 유명계곡(입구지계곡) 갈림길 - 마당소 - 용소 - 박쥐소 - 원점회귀
대부분의 등산객이 휴양림 오른편의 능선길을 택해 산행을 시작합니다. 초입부터 사방을 가득 채운 잣나무와 낙엽송림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코끝을 스칩니다. 숲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도심의 콘크리트 열기는 완전히 차단됩니다. 숲이 워낙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정상에 닿기 전까진 시원한 조망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오르막을 지나 능선의 끝자락에 서면, 시야가 거짓말처럼 사방으로 터지며 해발 862m의 정상 광장이 나타납니다. 정상석 주변으로는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어 고산 지대 특유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펼쳐집니다. 동쪽으로는 용문산의 가섭봉과 장군봉이 칼날 같은 능선을 뽐내고, 북쪽으로는 북한강 줄기가 아스라이 내려다 보입니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유명산의 상징과도 같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과 광활한 억새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활공장에 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가평군 설악면 일대가 미니어처처럼 조그맣게 펼쳐져 있고 타이밍이 좋으면 오색빛깔의 패러글라이더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을 수놓는 이색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능선을 오르며 쌓였던 육체적 피로가 시원한 조망과 함께 단번에 날아가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감동을 뒤로하고 하산길로 접어들면 산세는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계곡 분기점까지 가파른 흙길을 지나면 계곡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물과 바위의 대(大)서사가 시작됩니다. 유명계곡(입구지계곡)은 가평 8경 중 제8경으로 지정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합니다. 하산길은 거대한 암반과 크고 작은 돌들이 뒤섞인 너덜길로 이루어져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마당소, 용소, 박쥐소를 지나는 계곡 하산길은 물소리가 끊이지 않아 귀가 즐겁습니다.
산행 팁 - 짜릿한 계곡 포인트
유명계곡은 하산하는 내내 등산로 바로 옆으로 완벽한 물줄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각 소(沼)들이 눈에 띄는데, 수심이 깊어 위험해 '수영금지' 표지판이 명확이 붙어 있는 곳은 절대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특히나 유명산의 유명계곡은 수량이 매우 풍부한 곳입니다 비가 내린 직후에는 물이 급격히 불어나 돌길이 매우 미끄럽고 위험해지므로 가급적 계곡 코스를 피하고 능선 원점회귀를 택해야 합니다. 여름의 계곡물은 그냥 차가운 것이 아닙니다. 발을 담그는 순간 뼈다미가 끊어질 것 같은 짜릿한 통증 뒤에 밀려오는 극강의 시원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입니다. 계곡 하류인 자연휴양림 산책로 인근으로 내려올수록 수심이 얕아지고 평탄해져서 가족단위 행락객들이 많아집니다. 또한 하류 쪽은 사람도 너무 많고 수심이 지나치게 얕아 어른들이 제대로 물놀이를 즐기기엔 아쉬움이 큽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주능선을 타고 올라 상류의 프라이빗하고 깊이감 있는 명당 포인트를 선점하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1박 2일을 계획하는 분들은 가성비 좋은 '유명산자연휴양림'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내부도 매우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고 온수도 잘 나와 산행 후, 혹은 계곡 물놀이 후 피로를 풀기에 최적입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빈방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예약전쟁이 치열합니다. 유명산을 계획하신다면 국립자연휴양림 통합 예약 플랫폼인 숲나들e를 통해 미리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에필로그
유명산은 볼수록 묘한 매력을 지닌 산입니다. 유명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현대의 해프닝으로 지어졌지만 산이 품은 자연의 깊이는 수백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오르는 길은 부드러운 흙길이지만 내려오는 길은 거친 돌길인 코스의 다채로움 덕분에 지루할 틈 없이 완등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산입니다. 또한 수도권에서 1시간 내외로 접근할 수 있다는 엄청난 이점 때문에 여름철 물놀이 산행을 즐기기에 단연 원탑인 코스입니다. 선선한 그늘을 내어주는 주능선 길, 탁 트인 용문산 조망을 선물하는 정상, 그리고 가슴속까지 얼려버리는 명품 유명계곡과 가성비 최고의 자연휴양림까지. 지루할 틈이 없는 완벽한 여름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산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와 역대급 폭염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집에만 계시지 말고 사랑하는 친구, 연인, 혹은 동료들과 함께 가벼운 배낭을 메고 가평 유명산으로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 생각합니다. 청량한 잣나무 향기와 얼음장 같은 계곡물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전하고 즐거운 여름 산행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더 멋지고 수려한 대한민국의 명산 소개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