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산을 마주합니다. 어떤 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어떤 산은 칼날 같은 암릉으로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우뚝 솟은 천마산(天摩山)은 내게 후자에 가까운, 그러나 그 거친 숨결 뒤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밀한 비경을 감춘 반전의 산으로 기억됩니다.
한국의 100대 명산 <천마산> - 하늘을 만지는 산
해발 812m. 아주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수도권 평지에서 바라보는 천마산의 독보적인 산세는 그 수치 이상의 중량감으로 다가옵니다. 이름 그대로 '하늘을 만질 수 있는 산'인 천마산은 주봉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능선이 방사상으로 뻗어 나가, 어느 기슭에서 바라보아도 당당한 정상을 마주할 수 있는 독특한 기하학적 산세를 자랑합니다. 과거에는 지형이 너무나 험준하고 복잡하여 시집간 여인이 이 산을 보면 '소박맞은 산'이라 혀를 찼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등산로 초입이 정비되고 계단이 놓이면서, 천마산은 자연의 웅장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는 수도권의 '명품 산행지'로 탈바꿈했습니다. 1983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1995년 남양주 군이 시로 승격되며 시립공원이 되었고, 마침내 2023년 8월 8일 자로 공식적인 시립공원의 지위를 굳건히 한 남양주의 상징이다. 지질학적으로 천마산은 흥미로운 조형미를 가진다. 인근의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백색의 기암괴석을 뽐내는 반면, 천마산은 풍화와 삭박에 취약한 편암과 편마암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풍화된 암석이 깊고 비옥한 흙(육산의 형태)을 만들어내어, 수목이 숨 막힐 정도로 울창하고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어냈습니다. 과거 묵현리 방면에는 1980년대 초 개장하여 서울 근교 스키장의 효시 역할을 했던 천마산 스키장이 존재했으나, 세월의 무상함 속에 2021년 6월 30일을 기점으로 폐업하여 이제는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천마산은 상업적 유원지의 흔적을 지워내고, 온전한 자연과 역사의 명산으로 우리 곁에 복귀했습니다.
등산코스 안내
천마산은 산세가 방사상으로 퍼져 있는 만큼, 등산의 목적과 체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코스가 명확하게 갈립니다.
① 호평동 코스: 평내호평역 - 수진사 입구 - 천마산 시립공원 입구 - 임도 - 꺽정바위 - 정상
가장 많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천마산의 표준'입니다. 초입은 넓은 콘크리트 길과 완만한 야자 매트로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초보자도 부담 없이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본색을 드러내며, 역사적 의적의 이름이 붙은 꺽정바위 근처부터는 가파른 암릉과 계단이 쉴 새 없이 몰아쳐 숨을 가쁘게 만듭니다. 이정표가 완벽하고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으며 대중교통 연계가 환상적이라 초행길에 가장 추천하는 코스입니다.
② 관리소 코스: 마석역 - 관리소(매표소 입구) - 심신수련장 - 야영장 - 깔딱고개 - 보구직기 - 정상
과거 군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전통의 코스입니다. 초입의 울창한 잣나무 숲길과 흔들다리(구름다리)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이 큽니다. 이 코스의 승부처는 단연 '깔딱 고개'입니다.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약 500m의 급경사 암석 구간은 허벅지가 터질 듯한 고통을 선사하지만, 이 구간을 악으로 버텨내고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사방으로 터지는 남양주의 조망이 고통을 순식간에 보상해 줍니다. 산을 타는 손맛과 리듬감을 즐기는 베테랑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③ 천마산역 코스: 천마산역 2번 출구 - 등산로 입구 - 뾰족봉 - 정상
전철역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등산로가 시작되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접근성을 자랑하는 코스입니다. 거리가 가장 짧은 만큼 완충 구간이 없습니다. 시작부터 정상까지 타협 없이 경사도를 치고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중간 기점인 뾰족봉으로 향하는 길은 상당히 거칠고 가파른 암릉이 이어지므로 반드시 등산화를 착용해야 합니다. 블랙야크 100대 명산 인증을 위해 최단 시간 산행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최적입니다.
④ 팔현리 코스 오남저수지/팔현리 종점 - 다래산장 - 팔현리 계곡 - 정상
능선이 아닌 깊은 골짜기를 따라 정상으로 진입하는 코스입니다. 앞서 언급한 봄철 야생화의 대군락을 온전히 품고 있는 루트이며, 여름철에는 가장 시원한 그늘과 물소리를 제공합니다. 편마암 지대 특유의 깊은 흙길과 이끼 낀 계곡 바위들이 어우러져 마치 강원도 깊은 오지의 산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비된 계단보다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길을 걷는 즐거움이 크지만, 우천 후에는 길이 매우 미끄러우므로 안전 장구를 철저히 구비해야 합니다.
제가 즐겨찾는 코스는 호평동 코스로 완만하게 등판하여 정상의 웅장함을 즐긴 뒤, 경사가 가파르지만 거리가 짧고 교통이 편리한 천마산역 코스로 하산하는 횡단 산행을 즐깁니다. 이 방법을 택하면 천마산이 가진 육산(흙산)의 부드러움과 골산(바위산)의 거친 매력을 하루 만에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팁 - 구름위의 산책
천마산을 이야기하면서 '운해(雲海)'를 빼놓는 것은 이 산의 심장을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천마산은 서울 근교에서 북한산 백운대와 더불어 가장 완벽하고 화려한 운해를 감상할 수 있는 '운해 맛집'으로 통합니다. 정상에서 마주하는 운해는 지상에 내려앉은 천상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구름의 고도와 내가 서 있는 정상의 높이가 정확히 일치할 때, 산봉우리들은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 됩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서히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 멸도봉 능선을 부드럽게 넘나드는 구름의 폭포를 보고 있으면 지상에서의 모든 고뇌와 피로가 찰나의 순간에 휘발됩니다. 붉은 태양이 구름의 바다 한가운데를 뚫고 솟아오르는 일출의 순간은, 그야말로 별 천만 개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인생 최고의 경이로움이 될 것입니다. 이 장엄한 풍경은 자연이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복권과 같습니다. 완벽한 운해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기상 데이터 분석과 약간의 운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저의 경험으로 적립한 운해 포착 팁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일교차가 10 ℃ 이상이 차이가 나야하고 대기 습도가 최소 90% 이상 되면 좋습니다. 풍속은 초속 1.0m~2.0m 내외의 잔잔한 상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잘 맞아떨어지면 환상적인 운해를 맛볼 수 있습니다.
천마산은 온대 중부림의 전형을 보여주는 식생의 보고입니다. 소나무와 더불어 굴참나무, 신갈나무 등 참나무류가 숲의 뼈대를 이루고, 서어나무, 고로쇠나무, 까치박달 같은 낙엽활엽수가 우점종을 이루어 계절마다 완전히 다른 옷을 갈아입습니다. 봄에는 사진작가들의 성지라고 불리웁니다. 3월부터 4월에 이르는 천마산의 봄은 지독하게 화려합니다. 화강암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토양이 품어낸 야생화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밀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남읍 방면의 팔현리 계곡은 이 시기가 되면 전국에서 몰려든 사진작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잔설이 다 녹지도 않은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황금빛의 복수초, 가녀린 보라색의 처녀치마,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요정을 닮은 너도바람꽃 등 희귀 야생화의 군락지가 펼쳐집니다. 초입의 진달래와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 발밑에 숨어 있는 이 작은 생명들을 발견하는 기쁨은 천마산 봄 산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톤치드의 터널과 계곡의 청량함이 있는 여름의 천마산은 거대한 초록빛 장막입니다. 참나무류와 울창한 잣나무 숲이 하늘을 가려 거대한 천연 그늘 터널을 형성합니다. 따가운 햇볕이 차단된 숲길을 걸으면 숲 전체가 내뿜는 진한 피톤치드 향이 폐부 깊숙이 박힙니다. 경사가 급해 땀은 비 오듯 흐르지만, 골짜기마다 흐르는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무더위는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여름 산행이 주는 특유의 청량함과 거친 생명력을 만끽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황금빛 참나무 군락과 오색 단풍이 조화를 이루는 10월 하순이 되면 천마산은 단풍의 마법에 빠집니다. 기암괴석이 적은 대신 산 전체를 뒤덮은 참나무 군락이 일제히 황금빛과 갈색으로 물들어가고, 그 사이사이로 단풍나무의 붉은빛이 점묘화처럼 박힙니다. 능선을 따라 걸으며 바라보는 남양주 시내의 전경과 오색으로 물든 주변 산그리메의 조화는 고즈넉하면서도 깊은 가을 정취를 선사합니다. 가을의 천마산은 차분하면서도 웅장한 달마대사의 풍모를 가장 잘 닮아있습니다. 겨울엔 가성비 최고의 상고대와 화려한 눈꽃산행을 할 수 있습니다. 겨울 천마산은 등산 마니아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활엽수림이 빽빽한 지형적 특성 덕분에 눈이 내린 직후 산을 오르면 대관령이나 지리산 부근에서나 볼 법한 압도적인 상고대와 설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수도권과 인접해 접근성이 극대화된 위치에서 이토록 완벽한 눈꽃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게다가 웬만한 폭설이 내리더라도 산행 통제가 거의 없어, 겨울산의 호방함을 안전하게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에필로그 - 산이주는 위로
천마산 산행을 마치고 원점으로 회귀하여 가만히 지나온 능선을 올려다보면, 812m의 산이 내어준 길은 생각보다 꼬불꼬불했고, 아기자기했으며, 때로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가팔랐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거친 암릉에 무릎을 꿇을 뻔하기도 했고,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계란꽃(개망초)과 춤추는 나비의 우아함에 발걸음을 멈추고 미소 짓기도 했습니다.천마산은 참으로 밀당을 잘하는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냥 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도전하지 못할 만큼 오만하지도 않습니다. 적당한 고통을 통해 등산객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정상에 선 이들에게는 운해와 아름다운 시야라는 압도적인 상을 내려 기를 살려줍니다. 만약 일상에 지쳐 삶이 심심하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복잡하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다면 배낭을 메고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실어보길 권해드립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구름의 바다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상석을 터치하는 순간은 이미 단순한 등산객이 아니라 대자연의 위대한 흐름과 조우한 한 명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가을이 깊어질 시기에, 황금빛 참나무 숲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러 나는 다시 한번 천마산의 거친 품으로 뛰어들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