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여행계획을 짜다가 한라산 쉽다는 얘기 많이 들었을 겁니다. 등산화 끈 묶고 올라갔다가 중간에 주저앉은 사람, 주변에 한두 명은 있을 겁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한국의 최고봉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관광객들이 줄줄이 올라간다는 말만 믿고 방심했다가는 다리 풀린 채 뻗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라산은 쉬운 산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산들과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어렵습니다.
한국의 100대 명산 <한라산>
한라산은 해발 1,947m로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높은 산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날카로운 암릉보다, 멀리서 바라보면 완만하게 펼쳐진 넓은 능선이 환하게 들어옵니다. 이건 한라산이 순상화산(楯狀火山)이기 때문입니다. 순상화산이란 점성이 낮은 현무암질 용암이 넓게 흘러 방패처럼 납작하게 퍼진 화산 지형을 뜻합니다. 하와이 킬라우에아와 비슷한 구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의 설악산이나 치악산처럼 사람이 네발로 기어오르는 구간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등반코스 안내 - 한라산은 쉽다?
정상인 백록담(白鹿潭)까지 오르는 코스를 보면 현재 성판악과 관음사 두 가지 코스가 있습니다.
성판악 코스는 출발점 해발 750m에서 시작해 약 10km를 걸어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공식 소요시간은 편도 4시간 30분이고, 초입부터 속밭까지 완경사 4.1km, 속밭에서 진달래밭까지 중경사 3.2km, 진달래밭에서 정상까지는 급경사 2.3km로 나누어집니다. 올라갈수록 점점 가팔라지고 힘들어지는 구조입니다. 설악산의 오색 코스나 지리산의 중산리 코스가 해발 고도 약 1,300m를 약 5~6km 안에 올라야 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성판악 코스는 같은 고도를 두 배 가까운 거리에 걸쳐 분산시킨 셈입니다. 경사 자체는 완만하지만, 대부분이 돌밭인 탓에 튼튼한 등산화 착용을 추천드리고 일반 운동화는 발바닥이 매우 아플 것입니다. 제가 다녀왔을 때에도 경사도 및 난이도는 다른 여느 산보다도 덜한데도 불구하고 발바닥이 아프다는 신호가 생각보다 일찍 온다는 점이었습니다.
관음사 코스는 출발점이 해발 615m로 모든 코스 중 가장 낮고 거리는 9km 정도입니다. 숫자만 보면 성판악보다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전혀 다른 산 같습니다. 계곡을 따라서 급경사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해서 이어지기도 하고, 해발 1,000m를 넘겼는데도 안내 표지판 상에 불과 100m 밖에 진행되지 않았다는 문구를 보면 정신적으로도 매우 힘들어지게 됩니다.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기에 쉽사리 설명이 어렵습니다. 저는 이 코스의 난이도를 월악산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성판악 코스에 비해서 길이 험한 편이라 조난사고도 이 코스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는 점을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라산 국립공원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아닌 제주특별자치도가 직접 관리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입산 통제 기준이나 운영 방식이 다른 국립공원과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간지점인 속밭대피소나 진달래밭 대피소에 하절기 12시 30분, 동절기 11시 30분 까지는 도착을 하여야 정상으로 가는 입구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출발 전에 한라산국립공원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 탐방로 개방여부나 기후 등을 반드시 확인하고 가셔야 합니다.
팁
일반적으로 성판악으로 올라가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가 정석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쉬운 쪽으로 올라가고, 하산 후 제주시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입니다. 효율적인 선택인 것 맞습니다. 그런데 경험 상 풍경 측면에서는 꽤 아쉬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성판악 코스는 마지막 정상 직전 구간을 제외하면 시야가 숲으로 막혀 볼거리가 거의 없습니다. 숲속 트레킹이라고 보시면 맞을 것입니다. 반면 관음사 코스에는 삼각봉, 용진각, 왕관릉, 병풍바위 같은 볼거리들이 몰려 있는데, 이것들은 올라가는 방향에서 봐야 제대로 보입니다. 내려올 때는 시간에 쫓기거나 급하게 하산을 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볼거리들을 놓치거나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제가 관음사 코스를 진행할 때 이러한 볼거리들을 그냥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습니다. 쉽게 오지 못하는 한라산인 만큼 못 보고 지나치면 아쉬움이 클 것입니다.
진짜 한라산다운 경관을 보고 싶다면, 힘이 조금 들더라도 관음사로 올라가는 선택을 고려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그만큼 체력적인 소모가 크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 또한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백록담에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타이밍이 또한 중요합니다. 백록담은 산정화구호(火口湖)입니다. 화구호란 화산 분화 후 형성된 분화구에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를 말합니다. 여름철에는 물이 없는 경우가 많고, 태풍이나 집중호우 직후를 노리는 것이 유리합니다. 성판악코스에서 오를 수 있는 사라오름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원한 물에 발이라도 담가 온몸을 식힐 수 있다면 위 팁을 참고하세요.
지형학적으로도 한라산은 단순한 순상화산이 아닙니다. 정상부 백록담의 절반은 조면암질 마그마가 분출해 형성된 종상화산 구조입니다. 조면암질 마그마란 점성이 높아 멀리 흐르지 못하고 돔처럼 뭉치는 성질을 가진 마그마로, 이는 한라산의 과거 분화가 하와이처럼 조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질학적 증거입니다.
2014년 한라산이 사화산에서 활화산으로 재분류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정상 등반 후에는 한라산관리사무소 또는 무인발급기, 스마트폰 어플로 등반인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요금은 1,000원이고, 스마트폰 사용자라면 정상에서 사진을 찍은 직후 GPS 정보를 활용해 온라인으로 미리 신청해 두고 내려오는 방법이 훨씬 편합니다. 현장 무인기는 사진 업로드와 결제 과정이 생각보다 번거롭습니다.
한라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공통으로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물을 충분히 안 챙겼다는 점인데, 한라산에 있는 대피소에는 매점도, 자판기도 없습니다. 올라가는 내내 물을 구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것이 맞습니다. 솔직히 이건 처음 갔을 때 예상 밖이었습니다. 다만 한라산 탐방로 입구에 제주의 지역 명물(水) 삼다수가 시중 편의점보다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물을 안 가지고 왔다면 자판기에서 삼다수를 준비해 가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맺음말
한라산은 분명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그 어려움이 암릉이나 급경사보다는 긴 거리와 고도에서 옵니다. 쉽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고, 어렵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쉽다는 말만 믿고 준비 없이 올라갔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충분한 물과 탐방로 숙지를 한번 더 고민해 보시고, 가능하다면 볼거리가 풍부한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 성판악 코스로 내려오는 방향, 성판악에서 샛길로 빠져 사라오름도 경험해 볼 수 있는 방향을 시도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대표하는 산답게, 제대로 준비하고 제대로 즐긴다면 그만큼 돌려주는 산이 바로 한라산입니다.